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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T, 현대화폐이론, 리카도 등가정리, 경제 이야기

경제

by 경제학자 양나희 2025. 5. 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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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은 나쁘다라는 관념은 오랜 시간 동안 경제학 교과서에서 거의 도그마처럼 받아들여졌던 신념입니다. 균형재정, 건전한 재정, 구조조정… 이런 단어들은 특히 위기 이후의 경제 회복 담론 속에서 반복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어 코로나19 팬데믹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인플레이션의 귀환, 그리고 탈탄소 시대의 대규모 재정 투자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고전적 규율에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경제학계는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이라는, 기존 이론 체계를 뒤흔드는 대안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MMT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MMT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MMT

“통화 발권력을 가진 국가는 파산하지 않는다. 따라서 재정적자는 반드시 악이 아니다.”

일부는 이 주장을 경제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르며 환호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재정 무책임의 이론적 포장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현대화폐이론의 주장은 그 자체로 기존 경제학의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전통적으로는 국가의 재정 운용이 조세 수입에 기반해 제한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겨졌으며, 정부지출은 민간자본의 유입을 위축시키는 이른바 구축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 고전적 해석이었습니다.

 

하지만 MMT는 그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이 이론은 국가를 단순한 경제 행위자로 보기보다는 화폐 질서의 주권자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이 주권이 행사되는 핵심 수단이 바로 자국 통화 발행권입니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중앙은행이 매입함으로써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은 화폐의 공급자로서 정부의 역할을 명확히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화폐 공급은 결코 빚을 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통화를 만들어 경제에 순환시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MMT는 실업을 단순한 노동시장 불균형의 결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정부가 유효수요를 충분히 창출하지 않았다는 경제적 실패의 결과로 간주하여 민간부문이 감당하지 못하는 수요 공백은 정부가 재정지출을 통해 적극적으로 메꿔야 하며, 그 재정적자는 경제가 안 좋은 탓이지, 정부가 돈을 방만하게 써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조세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MMT에 따르면, 조세는 정부의 지출을 위한 재정적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량을 조절하고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며, 소득 재분배를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세금을 걷기 때문에 정부가 지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이미 통화를 공급하고 난 뒤 그 흐름을 회수하고 균형화하기 위해 조세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은 경제학의 기존 통념, 특히 리카도 등가정리와 강하게 충돌한다. 해당 정리는 현재의 정부지출은 미래의 조세 증가로 이어질 것이므로, 합리적인 경제주체는 이를 감안해 현재 소비를 줄인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MMT는 이 가정을 실질 세계에 맞지 않는 이론적 허구로 보며 특히 실업률이 높은 상황에서 정부지출이 미래 세대에 부담이 된다는 논리는 경제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MMT는 정부의 역할, 화폐의 본질, 조세의 의미에 대한 경제철학의 전면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통화적 사고방식은 오늘날처럼 구조적 저성장과 고불평등, 그리고 반복되는 위기가 교차하는 시기에 더욱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MMT의 재부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리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전 세계 주요국들은 무제한 양적완화와 대규모 재정 확대를 통해 경기부양에 나섰습니다. 미국의 경우, GDP 대비 재정적자는 2020년에 -14.9%를 기록했으며, 일본은 이미 부채비율이 250%를 초과했지만 놀랍게도 그로 인해 인플레이션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시장도 재정 위기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부채를 쌓았는데도 위기가 발생하지 않은것에 대한 관념이 MMT에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미국의 스테파니 켈튼 교수는 『부의 신화』를 통해 MMT의 대중적 확산을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MMT를 둘러싼 논쟁은 현대 거시경제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과 그 규범적 기반을 둘러싼 충돌로 읽힙니다. 찬성 진영에서는 MMT는 고정환율제나 금본위제처럼 과거에 맞춰 설계된 이론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며 반면 반대 진영은 MMT가 통화의 본질은 물론, 제도와 시장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이론적 급진성만으로 현실을 해석하려 한다는 비판을 멈추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MMT가 제안하는 고용 보장 프로그램은 찬반 논쟁의 핵심 쟁점입니다. 이는 실업이 개인의 실패나 기업의 수익성 부족이 아니라, 정부의 재정 역할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가정 위에 세워집니다. 정부가 최종 고용자가 되어 노동시장의 최하단에 임금 하방 경직성과 경기 대항력을 동시에 부여하는 구조이며 이는 전통적 케인즈주의도 감히 상정하지 못한 국가 역할의 확장이며,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실업이라는 비효율을 정부가 흡수할 수 있느냐를 두고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반대 진영은 MMT의 주장 속에 내재된 통화와 재정의 경계 붕괴를 우려합니다. 특히 중앙은행의 독립성 침해는 경제학계가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해온 통화정책의 신뢰 기반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사안입니다. 과거 수많은 인플레이션 사례들이 정부의 과도한 화폐 발행 개입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들어, MMT가 주장하는 방식대로 정부가 지출을 계속 늘릴 경우, 필연적으로 자산 시장 과열과 통화가치 불안정, 그리고 결국엔 인플레이션의 귀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채와 조세에 대한 MMT의 해석, 즉 그것이 단지 통화의 순환을 위한 기술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관점은 경제학의 고전적 금융이론과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시장이 국채를 리스크 없는 자산으로 평가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산 가격, 이자율, 투자결정이 조정되는 메커니즘을 무시하고선, 실물경제와 금융경제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MMT에 대한 경제학계의 반응은 공감과 경계 사이를 오가며 일부는 이 이론이 장기적인 통화 질서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또 다른 일부는 그것이 정치인들에게 재정규율 해체의 이론적 면죄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학적 위험을 감지합니다.

 

경제학자 로렌스 서머스의 말은 이 긴장 구조의 핵심을 꿰뚫는 말을 합니다. “MMT는 재정정책의 규범을 무너뜨리는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단기적 해방감이 아니라 장기적 혼란일 수 있다.” 이는 MMT를 둘러싼 논쟁이 경제학이 현실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MMT와 재정 지속가능성

이처럼 MMT는 이론적 정합성뿐 아니라, 정책의 장기적 지속 가능성이라는 실천적 차원에서도 날카로운 질문들을 남깁니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첫 번째 물음은 바로 ‘r < g’ 조건의 지속 가능성입니다. 이는 2019년, 전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미국경제학회 연례강연에서 제시한 논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적 자료에 기초해, 경제성장률(g)이 명목이자율(r)보다 높은 경우에는 부채비율이 자동으로 안정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재정적자는 반드시 축소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는 하나의 조건 하에서만 유효한데 성장률이 장기적으로 금리보다 높은 상태가 유지된다는 가정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이 가정이 얼마나 취약한 전제 위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기술 진보의 둔화, 인구 고령화, 노동 생산성의 정체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시대에, 고성장이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면, 시장금리는 인플레이션 기대 상승, 신용리스크 재평가 등으로 언제든지 상승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MMT가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할 수 있는 바로 그 ‘금리 리스크’는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뒤흔들 수 있는 변수입니다.

 

두 번째 쟁점은 통화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 신뢰의 국제적 위상이다. MMT는 자국 통화 발권 국가라면 언제든 채무를 화폐로 상환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만, 이는 미국, 일본과 같은 기축통화국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입니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은 여전히 외화표시 부채에 의존하고 있으며,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채무불이행 리스크에 노출돼 있습니다. 즉, 자국 통화 발행권이 무기다라는 주장은 글로벌 금융구조의 불균형을 도외시한 편향적 해석일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통화가 세계시장에서 얼마만큼의 신뢰를 확보하고 있는가는, 통화 발행 능력 이상으로 제도, 정치 안정성, 역사적 신뢰 축적 등 복합적인 요소에 좌우됩니다.

 

세 번째로, MMT의 실행 가능성은 정치경제학적 현실성에 의해 시험받습니다. 정부는 본질적으로 재선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행위자이며, 이는 경제학적으로도 정치적 순환 가설이라는 개념으로 오래전부터 이론화되어 왔습니다. 일단 정부에 무제한적인 재정 지출의 정당성이 부여되면, 정치권은 그것을 공공재 투자보다 단기적 인기 정책, 즉 소비적 지출에 우선 활용할 유인을 갖습니다. 이는 재정건전성보다 정치적 생존이 우선시되는 의사결정 구조 하에서 더욱 심화됩니다. 결국 국가의 돈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정책의 책무성과 효율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모든 논점들을 종합해보면, MMT는 이론이 현실 속 정치제도, 국제통화질서, 그리고 민간부문의 기대 형성 메커니즘과 어떻게 접합되는것이 MMT가 진정한 정책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열쇠입니다.

마치며

결국 MMT는 경제학의 단단한 기성 구조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이단적 이론이라기보다는, 경제학이 직면한 현실의 모순에 반응하여 재구성된 하나의 대안적 상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문의 방향 자체를 바꾸어 "정부는 얼마까지 빚을 져도 되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을 넘어, "정부는 그 빚을 통해 누구를 보호하고,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라는 규범적 전환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재정정책 담론은 대체로 숫자에 매몰되었습니다. 부채비율 60%가 넘으면 경고등이 켜지고, 적자가 GDP의 몇 퍼센트를 초과하면 긴축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식의 정태적 판단 기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MMT는 그 기준의 전제를 해체합니다. 그것은 부채를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선택의 결과이자 도구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 불평등 완화, 공공의료 확충, 디지털 전환 등 우리가 마주한 구조적 과제들은 모두 시장의 자율성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과제들 앞에서 정부의 역할은 축소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재정적으로 다시 강화되어야 할 책임 기관으로 부상합니다. 물론, 그 책임에는 위험도 따릅니다. 아무리 이론이 강력한 논리를 제시하더라도, 현실의 정치는 그것을 선별적으로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소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MMT의 주장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번역되고, 어떤 권력구조 속에서 구현되는지를 함께 감시해야 합니다.

 

경제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원리를 통해 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을 설계하기 위함입니다. MMT는 그 설계의 일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설계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론이 권력이 될 때, 경제학은 더욱 스스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더 이상 숫자만으로는 경제를, 그리고 사람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물어야 할 때입니다. 부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지출은 어떤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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